경제학은 오랫동안 수학적 모델과 합리성 가정을 기반으로 한 ‘주류 경제학(오토르도시)’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이러한 접근은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데 높은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비롯한 여러 현실 문제 앞에서 그 한계가 드러났다. 이처럼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하나의 이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었고, 그 결과 등장한 흐름이 바로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Post-autistic economics)이다. 이 용어는 원래 ‘자폐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담고 있었지만, 현재는 ‘주류 경제학의 폐쇄성과 현실과의 단절’을 비판하며 ’다원주의(pluralism)’를 강조하는 학문적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이 제기하는 문제의식, 왜 경제학은 다원적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흐름이 학문과 정책에 어떤 변화를 촉진하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1.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요구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의 출발점은 주류 경제학이 지나치게 수학화되었고, 현실 세계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다. 특히 이들은 경제학이 지나치게 ‘정태적’이고 ‘폐쇄된 체계’를 상정하고 있으며,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전통 경제학은 인간을 합리적이고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단순화하며, 시장을 효율적이고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메커니즘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모델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불확실성과 위기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다. 예컨대 금융위기나 팬데믹, 기후변화와 같은 시스템적 충격은 복잡성과 상호작용, 제도적 맥락이 결정적인데, 주류 경제학은 이를 설명하는 데 취약하다.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의 병렬적 존재, 즉 경제학의 다원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이론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전환이다.
2. 다원주의의 의미와 학문적 실천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이 말하는 다원주의란 단지 여러 이론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현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서로 보완하려는 시도다. 예컨대 한 현상을 설명할 때 수리 모델뿐 아니라 제도적, 역사적, 심리적, 윤리적 요소까지 함께 고려하는 접근을 지향한다. 이 과정에서 행동경제학, 제도경제학, 진화경제학, 생태경제학 등 그동안 주변부에 머물렀던 학파들이 중심으로 부상한다. 또한 이들은 정량적 분석 외에 정성적 방법, 사례 연구, 질적 인터뷰, 시뮬레이션 모델 등도 적극 수용한다. 이는 경제학을 보다 현실 친화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학문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며, 단순한 방법론의 다양화를 넘어 학문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학생들과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히 퍼지고 있으며, 실제로 여러 대학에서는 경제학 커리큘럼의 개편, 학제 간 연구, 대안 교과서의 개발 등 실질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3. 정책과 사회적 책임의 새로운 기준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은 학문적 영역을 넘어, 경제학이 사회에 미치는 책임과 역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주류 경제학은 오랜 시간 시장 효율성과 성장에 초점을 맞추며, 공공정책의 중립성과 수치화 가능한 성과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경제 정책이 사회적 약자에 미치는 영향, 세대 간 형평성,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같은 정량화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다원주의 경제학은 이러한 요소들을 경제 분석의 범주로 포함시키며, 경제학이 사회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단지 경제학자의 자세나 태도의 문제를 넘어, 어떤 문제를 ‘경제 문제’로 규정하고 무엇을 ‘해결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전환이다. 따라서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복잡한 사회를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열린 틀을 제공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경제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학문은 단순함보다는 복잡함을, 통일보다는 다양함을, 추상보다는 구체성을 지향해야 한다. 포스트오토르도시 경제학은 그러한 방향성을 제시하며,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현실을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한 더 넓은 지적 공간을 열어준다. 경제학이 다시 인간과 사회, 역사와 윤리를 담는 그릇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제는 이 다원주의적 전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다.